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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 대전에 대하여

by 코우코우볼 2022. 9. 27.

 

1차 세계 대전에 대하여 알아보자

 

1차세계 대전이 발생하였던 그 당시 프랑스는 1870년에 발생한 프로이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프랑스 지역이 였던 알자스, 로렌 지방을 독일에게 떼어서 넘겨주며 국가적으로 심하게 수모를 겪고 있었던 상황이였습니다.

 

이러한 수모를 겪고 있었던 프랑스는 독일에게 복수를 할 기회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당시 독일의 총리였으며 독일의 국정을 다르리고 있었던 비스마르크는 1871년 독일이 제국의 형태로 하나의 국가로 독일을 통일 한 이후 위와 같은 프랑스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비스마르크는 외교적으로 프랑스를 고립시킬려고 하였습니다.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킬려고 했었던 이유는 프랑스를 고립시키면 프랑스에서 발생할수 있는 여러가지 충돌을 막을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킬려고 했습니다.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켰을 때 막을수 있었던 것들

  • 프랑스의 무력충돌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고 보안할 수 있습니다.
  •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월등한 군사력을 유지하며 프랑스의 복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습니다
  • 독일이 자신의 권력을 확대해도 프랑스가 전쟁을 걸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였습니다.

 

또한 비스마르크의 핵심은 외교적 생각은 독일의 우측에 있는 러시아에 있었습니다.

독일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서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독일의 양쪽에서 전쟁이 발생하는것을 막을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러시아와 가까워 지는것의 방해 요소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발칸반도의 패권을 포기 할수 없게 되자 1837년 비스마르크의 주도하에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함께하는 삼제동맹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자 추후에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의 삼국동맹을 결성하였습니다.

 

또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가까워지는것을 염려하여 영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해외식민지를 포기 하였지만 이러한 정책은 독일내에서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결국에는 빌헬름 2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비스마르크는 해임되었습니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와 다르게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빌헬름 2세의 적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가까워지게 되었고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가 친해진 상황에서 발칸반도는 양쪽을 폭발시킬 매개체와 같았습니다..

 

발칸반도는 그리스,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크로아티아 등이 유럽 대륙의 남동쪽에 위치한곳 이며 오랜 기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4세기로 부터 세르비아, 불가리아를 정복하며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지게 되고 보스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등 슬라비족이 주류를 이루는 나라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서 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러시아가 남하하여 러시아와 오스만 두 국가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러시아- 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친러시아 성향을가진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등의 나라들이 자치권이 인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유럽 강대국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같은 강대국들의 반발에 의하여 독일의 주도하에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유럽강국들의 발칸 반도내에서의 이권을 챙기기 위한 영토 가르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였던 프란트 페르디난트 대공은 1등 시민, 2등 시민으로 나누어 불평등한 구조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고 베를린 회의로 독립했던 슬라브 국가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남슬라브계를 세르비아로 포함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의 대합중국론은 제국내에 있는 슬라브계 민족이 제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세르비아인들의 불만이 점점 더 커져가는 중에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동진정책의 전초기지로 보스니아를 완전히 합치게 됩니다.

 

보스니아에는 많은 세르비안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와 합쳐져 남슬라브 국가의 형성이 불가능해지자 이에 대하여 증오에 하던 세르비아의 젊은 보스니아와 검은 손이라는 민족주의자들이 페르디난트의 제거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사라예보 사건은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계승자였던 프란트 페트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는 그들의 결혼 14주년 기념일에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에 참석하였고 보스니아의 젊은 민족주의자의 권총에 의하여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세르비아가 검은손 조직의 암살작전에 지원하였다고 압력을 가하게 되었고 1914년 7월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게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 동맹국이였던 독일은 세르비아를 돕기로한 러시아와 동맹국인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여 결국에는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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